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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진인 성 라마나 마하르쉬의 가르침

  

타밀어로 된 원문을 영어로 번역한 자 : T. M. P. Mahadevan 박사

 

영문으로 읽기 : Who-am-i.pdf

 

영어에서 한글로 번역한 자 : 황인채

   

번역자(황인채)의 각주 10개를 달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머리말

 

“나는 누구인가?(Who am I?)”(주1)는 자기탐구를 행하는 데에 필요한 질문들과 답변들을 모은 문서에 붙인 제목이다.

 

질문은 1902년경에 필라이 씨가 진인(眞人)(주2) 마하르쉬에게 하였다. 필라이 씨는 철학을 전공한 자로써 그 때에 아르콧 관구 국세청에 근무하였다.

 

공무로 띠루반나이말라이를 방문하였던 기간에, 그는 아루나찰라 산에 있는 비루팍샤 동굴로 가서 거기서 스승님을 만났다. 그는 스승님으로부터 영적인 인도를 받기를 원했고 자기탐구에 관한 질문들에 대답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진인은 그 때에, 침묵을 하겠다는 맹세 때문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몸짓으로 질문에 대답하였고, 그리고 몸짓이 이해되지 않았을 때는 글로써 대답하였다.

 

필라이 씨가 기억을 되살려서 기록하였을 때, 진인에게 질문하여 대답을 받은 열네 개의 문답이 되었다. 이 기록물은 필라이 씨에 의해서 1923년에 첫 번째로 편집되었는데,

 

“어떻게 진인의 은혜가 그에게 작용하여 그의 의문들이 해소되고 그가 생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는가.”에 관하여서 그가 쓴 한 쌍의 시도 그 속에 들어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는 그 후에 수차례 계속하여 편집되었다. 우리는 삼십 개의 질문들과 답변들로 이로어진 약간의 편집물들과 스물여덟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다른 편집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질문은 없고 진인의 가르침이 수필 형식으로 다시 정리된 또 다른 편집물도 있다. 현재에 있는 영어 번역물은 이 수필 형태로 된 것이다. 지금 내가 번역하고 있는 이 문서는 스물여덟 개의 질문들과 답변들로 되어있는 편집물이다.

 

“자기탐구(Self-Enquiry)”라는 출판물에 따라, “나는 누구인가?”는 스승님 자신이 쓴 글들로 첫 번째 문단을 시작한다.

 

이 두 문단 만이 진인의 저작들 가운데서 산문으로 된 글들이다.

 

그것들은 중심적인 가르침인 자기탐구가 해탈을 위한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자기탐구가 행해지는 특별한 방식이 “나는 누구인가?” 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마음은 생각들로 이루어진다. ‘나’라는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생각이다. 자기탐구 “나는 누구인가?”가 끊임없이 추구되었을 때, 다른 모든 생각들은 파괴되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나’라는 생각도 사라져서 최고이고 이원적이 아닌 진아(眞我)(주3) 만이 홀로 남는다. 거짓된 자아로 나타나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진아(眞我)로 여기는 잘못된 동일시는 이렇게 끝나고, 빛나는 계시가 나타난다.

 

자기탐구 과정은 쉬운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탐구할 때, 다른 생각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일어날 때, 그것들을 따름으로써 잡념에 무릎을 꿇어서는 아니 되고, 반대로, “그것들이 누구에게 일어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탐구를 통해서 마음을 그것의 근원에 머물게 하여야 하고, 마음이 방황하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그리고 마음이 만들어낸 생각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여야 한다.

 

호흡조절이나 신의 형상에 대한 명상들과 같은 모든 다른 훈련법들은 보조적인 수행법들로 간주된다. 그것들은 마음이 가라앉게 하여 일념 집중상태가 되도록 하는 데까지만 유용하다.

 

집중에 마음이 훈련되면 자기탐구는 비교적 쉽다. 잡념들을 억제하고 진아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진실로 끊임없는 자기탐구에 의해서이다. 진아 깨달음이란 나라는 생각조차도 그 속에 없는 절대적 실재(實在), 말없는 최고의 본체(本體)를 느끼는 체험을 말한다.

 

마드라스 대학에서 1982, 6, 30

 

진언 : 옴 나모 바가바테 슈리 라마나야(주4)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고통이 없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경우에 자신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리고 행복은 사랑의 목적지이기 때문에, 존재의 본성이고, 마음이 없는 깊은 잠 속에서 경험하는 행복을 얻기 위하여,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앎(知)의 길(道)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형태의 자기탐구는 주요한 수단이다.(주5)

 

1. 나는 누구인가?

 

일곱 개의 조직(tissue)(주6)으로 구성되어진 거친 몸은, 내가 아니다.

 

다섯 감각 기관들, 바꾸어 말하면, 듣고, 만지고, 보고, 맛보고, 그리고 냄새를 맡는 기관들이, 각각의 대상들, 바꾸어 말하면, 소리, 감촉, 색, 맛, 그리고 냄새들을 알아차리는데, 이 기관들도 나는 아니다.

 

다섯 가지 기능을 가진 기관들, 바꾸어 말하면, 말하고, 이동하고, 움켜잡고, 배설하고, 그리고 출산을 하는 기관들은, 그들 각각이 말하고, 움직이고, 움켜잡고, 배설하고, 그리고 즐기는 가능들은 하는데, 이것들도 나는 아니다.

 

다섯 가지 활력을 주는 바람(風)(주7)들은, 프라나(prana) 등으로, 이들은 호흡 등의 각각 다섯 가지 기능들을 행하는데, 이것도 나는 아니다.

 

생각을 하는 마음도 나는 아니다.

 

깊은 잠든 상태 등과 같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 속에서 대상들도 없고, 기능들도 없지만, 대상들에 대한 잠재 인상들은 숨어 있고, 이도 역시 나는 아니다.

 

2. 나는 이것들 중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에 대하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모두 부정한 이후에, ‘나는 존재한다.’는 것으로, 홀로 남겨진 ‘알아차림’이라는 것이다.

 

3. ‘알아차림’의 특성은 무엇인가?

 

알아차림의 특성은 ‘존재-의식-행복’이다.

 

4. 진아 깨달음이 언제 얻어질 것인가?

 

보여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세상이 사라졌을 때, 보는 자인 진아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을 것이다.

 

5. 세상이 (실체로 나타나) 있는 동안에라도, 진아에 대한 깨달음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있을 수 없다.

 

6. 왜 그런가?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은 ‘새끼줄과 뱀’과 같다.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보는 것과 같은 거짓된 앎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실체인 새끼줄에 대한 진실한 앎이 얻어질 수 없는 것처럼, 실체인 진아에 대한 깨달음은 세상이 실지로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제거되지 않는 한 얻어질 수 없을 것이다.

 

7. 보여지는 대상인 세상은 언제 사라지는가?

 

모든 인식과 모든 행동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세상은 사라진다.

 

8. 마음의 특성은 무엇인가?

 

마음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진아 안에 거주하는 놀랄 만큼 강한 힘이다. 그것이 모든 생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생각과 분리하여, 마음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생각이 마음의 특성이다. 생각을 떠나서 세상이라 일컬어지는 독립된 객체는 없다.

 

깊은 잠 속에서는 생각들도 없고 세상도 없다.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는 생각들과 세상이 있다. 거미가 (거미집의) 실을 내고 거미집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마음은 마음의 바깥으로 세계를 투사해 내고 그것 속으로 빠져들어 들어간다.

 

마음이 진아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세상이 나타나면, 진아는 나타나지 않는다. 진아가 나타나면 (또는 빛나면), 세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수행자가 끊임없이 마음의 특성을 탐구하면, 마음은 (찌꺼기로서) 진아로 살기를 그칠 것이다.

 

진아로 언급된 것이 아트만이다. 마음은 항상 거친 어떤 것에 의존하여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홀로 머물 수 없다. 미세한 몸이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음이다.

 

9. 마음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자기탐구의 길은 무엇인가?

 

이 몸 안에서 나로서 일어나는 것이 마음이다. 수행자가 몸 안에서 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곳을 탐구해 들어가면, 그것이 심장(주8)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마음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그가 끊임없이 ‘나, 나’라고 생각할지라도, 그 장소로 인도될 것이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가운데서, 나라는 생각이 첫 번째 것이다.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은 이것이 일어난 다음의 일이다. 이, 삼인칭 대명사가 일어나는 것은 일인칭 대명사가 나타난 이후의 일이다. 일인칭 대명사가 없다면 이, 삼인칭 대명사도 없다.

 

10. 어떻게 하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함에 의해서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다른 모든 생각들을 쳐부술 것인데, 마치 그것은 타는 장작더미를 휘졌기 위해 사용하는 막대기처럼 마지막에 그것 자신을 태워 없앨 것이다.

 

11.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붙들기 위한 수단은 무엇인가?

 

다른 생각들이 일어났을 때 수행자는 그것을 따라가서는 아니 되고, ‘그것들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하고, 탐구를 하여야 한다.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는 가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났을 때, 수행자는 부지런히 탐구해야 한다,

 

“누구에게 이 생각이 일어나는가?” 나타나는 대답은 당연히 “나에게”일 것이다. 그러면 곧 “(생각을 하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탐구한다면, 마음은 다시 그것의 근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일어난 생각은 가라앉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계속 수행한다면, 마음은 그것의 근원에 쉽게 머물 수 있도록 개발될 것이다. 미묘한 마음이 두뇌와 감각기관을 통하여 밖으로 나아갔을 때, 거친 이름들과 형상들이 나타난다. 마음이 심장 안에 머물렀을 때는 이름들과 형상들이 사라진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심장 안에 머문 것을 영성이라고 부른다. 마음이 심장에서 나간 것은 객체화라고 알려졌다.

 

이렇게 마음이 심장 안에 머물렀을 때, 생각들의 근원에 있는 ‘나’는 사라질 것이며, 그리고 항상 존재하는 진아는 빛날 것이다. 그 때 수행자가 무엇을 하든지, 자기중심적인 “나”가 없이 할 것이다. 그가 이런 상태에서 행동을 한다면, 모든 것은 쉬바(신)가 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12. 마음을 가라앉게 만드는 다른 수단들은 없는가?

 

자기탐구 외에 다른 적절한 수단은 없다. 다른 수단을 통하여 마음을 통제하여도, 통제된 것으로 나타날 것이지만, 그러나 다시 마음이 나타날 것이다. 호흡조절을 통해서도 마음은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호흡이 통제되어 있는 동안에는 마음이 가라앉고, 호흡이 다시 시작되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며, 남겨진 업장들이 다시 강요하듯이 마음은 방황할 것이다. 마음과 호흡의 근원은 같다.

 

생각은 마음의 특성이다. ‘나’라는 생각은 마음의 첫 번째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아이다. 자아가 시작된 바로 그곳에서 역시 호흡도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가라앉았을 때 호흡이 통제되고, 호흡이 통제되었을 때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깊은 잠 속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을지라도 호흡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신의 뜻으로써, 그렇게 하여야 다른 사람들이 잠든 자를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의 몸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상태 속에서와 삼매(三昧) 속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았을 때, 호흡도 통제된다.

 

호흡은 마음의 거친 형태이다. 죽는 순간까지, 마음은 몸속의 호흡을 지킨다.

 

그리고 몸이 죽을 때, 마음은 자신과 함께 호흡도 거두어간다.

그러므로 호흡을 조절하는 수련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보조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마음을 소멸시키지 않을 것이다.

 

호흡조절 수련처럼, 신의 형상에 대한 명상, 진언들을 암송하기, 음식물을 가려서 먹기, 등등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도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보조수단일 뿐이다.

 

신의 형상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그리고 진언 암송의 반복을 통하여, 마음은 일념집중 상태가 된다.

 

마음은 항상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코끼리가 나무줄기에 쇠사슬로 묶여있을 때 쇠사슬에 의해 허용된 곳 외에 다른 곳으로는 갈 수 없듯이, 그와 같이 마음이 이름이나 형상에 매달릴 때 마음은 그것에 스스로 붙잡힐 것이다.

 

마음이 수없이 많은 생각들의 형상들로 확장되었을 때, 각각의 생각들은 약해진다. 생각들이 사라졌을 때 마음은 일념집중이 되고 강해진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는 진아 탐구는 쉬워질 것이다.

 

모든 제한하는 규율들 가운데서, 적당한 양의 순수성(sattvic) 음식을 먹는 규율이 최고이다. 이 규율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 순수한 마음이 증가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진아 탐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13. 대상에 대한 잠재한 인상들이 큰 바다의 파도처럼 출렁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들이 언제 사라질 것인가?

 

진아에 대한 명상이 점점 높아지면, 생각들은 사라질 것이다.

 

14. 시작도 없는 오랜 시간 전에 시작된 대상들에 대한 잠재 인상들이, 만약 그것이 있다면, 제거되고, 그리고 수행자가 순수한 진아로서 남겨지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거나, 아니라거나”하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수행자가 끊임없이 진아에 대한 명상을 붙들어야 한다. 수행자가 큰 죄인이라면, “오! 나는 죄인이다.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인가?”하고, 걱정하고 울부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수행자는 “나는 죄인이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여야 한다. 그리고 진아에 대한 명상에 주의 깊게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두 개의 마음들은 없다. -하나는 선하고 다른 것은 악하다는. 마음은 단지 하나이다. 그것들은 두 종류의 잠재인상들이다. -길조와 흉조. 마음이 상서로운 인상의 영향 아래에 있을 때, 그것을 선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상서롭지 못한 인상 아래에 있을 때, 죄악이라고 간주한다.

 

마음이 세속적인 대상과 다른 사람에 관한 것으로 향하여 방황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쁠지라도, 수행자는 그들에 대한 미움을 내서는 안 된다. 사랑도 미움도 피해야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만약 이 진리가 이해된다면 누가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겠는가? 자기 자신이 일어날 때 모든 것이 일어난다. 수행자의 자아가 가라앉았을 때, 모든 것이 가라앉는다.

 

우리가 겸손함으로 행한 그 정도만큼, 그만큼 행운이 나타날 것이다. 마음이 가라앉게 된다면, 그는 어느 곳에 살아도 좋다.

 

15. 얼마나 오랫동안 탐구를 하여야하는가?

 

마음속에 대상에 대한 인상이 남아있는 한, 그 기간 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가 필요하다. 생각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들은, 탐구를 통하여, 그것이 생겨난 그때 바로 그 장소에서 소멸시켜야 한다.

 

만약 진아 명상을 끊임없이 의지한다면, 진아를 얻을 때까지, 탐구가 자기도 모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성채 안에 적이 있는 한, 그들은 반격을 계속할 것이다. 적들이 나타날 때 격퇴된다면, 성채는 우리 손에 함락될 것이다.

 

16. 진아의 특성은 무엇인가?

 

진리 안에 홀로 있는 것이 진아이다. 세계와 개인의 영혼과 신은 그것 안에서 출현한다. 조개 속 진주층 안의 은색 물질에 나타나는 무지개빛깔의 무늬처럼, 이 세 가지는 같은 시간에 나타나서 같은 시간에 사라진다.

 

진아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곳에 있다. 그것은 “말없는 자”라고 일컬어진다. 진아는 그것 자체가 세계다. 진아는 그것 자체가 “나”이다. 진아는 그것 자체가 신이다. 모두가 시바이고, 진아이다.

 

17. 만물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닌가?

 

원함과 의지와 노력이 없이도, 태양은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이 떠오르면, 일장석은 빛을 내고, 연꽃은 피어나며, 물은 증발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몇 가지 할일들을 행하고, 휴식한다. 마치 자석이 있음으로 바늘이 움직이는 것처럼,

 

영혼이, 자신의 업(karmas)에 따라서, 그리고 세 가지 우주적 기능들이나 신들의 다섯 겹의 행위(주9)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또한 휴식도하는 것은, 오로지 신이 묵묵히 있음의 덕택이다.

 

신에게는 의지가 없다. 집착하는 업이 신 자신에게는 없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행위들이 태양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고, 다섯 원소들의 공덕이나 부덕이 모든 곳에 펼쳐져 있는 허공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18. 모든 헌신자 중에, 누가 가장 위대한가?

 

그 자신을 신인 진아에게 바치는 헌신자가 가장 뛰어난 헌신자이다. 자신을 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떠오를 여지를 주지 않고 진아 안에 끊임없이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무거운 짐을 신에게 넘겨드릴지라도, 그는 그것을 달게 받는다. 신의 드높은 능력이 모든 사물이 움직이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가? 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하지 않을 것인가에 관하여 생각하며,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걱정해야 하는가?

 

우리는 기차가 모든 짐들을 운반하는 것을 아는데, 이에 따라서 짐을 기차 위에 내려놓고 편안해지지 않고, 왜 작은 짐을 우리 머리위에 올려놓고 고생스럽게 운반해야 하는가?

 

19. 집착이 없음은 무엇인가?

 

생각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비롯된 바로 그 곳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집착이 없음이라고 말한다.

 

진주 따는 잠수부가 허리에 돌을 묶고서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진주를 따듯이, 그렇게 집착이 없음으로 무장한 어떤 수행자가 자신의 자아 속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진주 같은 진아를 얻는 것이다.

 

20. 신과 진인이 한 영혼에게 해탈을 성취시켜 주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가?

 

신과 진인은 단지 해탈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들은 그 영혼을 해탈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사실 신과 진인은 다르지 않다. 호랑이 입속에 떨어진 먹이가 탈출하지 못하는 것처럼, 진인의 은혜로운 보살핌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진인에 의해서 구원될 것이고,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각 사람은 신이나 진인이 가르쳐준 방법으로 열심히 노력해야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수행자는 자신의 앎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지, 다른 어떤 사람의 눈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마(Rama 비슈누 신의 화신)인 그가 자신이 라마인 것을 알기 위하여 거울의 도움이 필요하겠는가?

 

21. 해탈을 열망하는 자가 범주의 특성을 탐구하는 것은 필수인가?

 

쓰레기를 던지려는 자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분석할 필요가 없듯이, 진아를 알기 원하는 수행자가 범주의 숫자를 세고 또 그 특성을 분석할 필요는 없다. 그가 하여야 하는 일은 진아를 가리는 범주들을 모두 거부하는 것이다. 세상은 꿈과 같다고 생각하여야 한다.

 

22. 생시와 꿈 사이에 차이가 없는가?

 

생시는 길고 한바탕 꿈은 짧다. 둘 사이에 차이는 없다. 생시에 일어나는 일이 깨어있는 자에게 사실인 듯이 느껴지듯이 꿈꾸는 사람에게는 꿈속이 사실인 듯하다. 꿈 속에서 마음은 다른 몸을 갖는다.

생시와 꿈 두 가지 상태 속에 생각들이 있다. 이름들과 형상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23. 해탈을 열망하는 자가 책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되는가?

 

모든 문서에는,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결정적인 가르침은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 이것이 이해되었으면 끝없이 독서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수행자는 단지 자신의 진아가 무엇인가 자신 속에서 탐구하여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 책 속에서 찾아질 것인가? 수행자는 자신의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자신의 진아를 알아내야 한다. 진아는 다섯 껍질들(주10) 속에 들어있다.

 

그러나 책은 그것들 밖에 있다. 진아는 다섯 껍질들을 제거하고 속으로 탐구해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 속에서 그것을 찾는 것은 무익하다. 수행자가 그가 배웠던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24.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은 진아의 중요한 특성이다. 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다. 세계의 어떤 대상 안에도 행복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통해서 행복을 대상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밖으로 나갔을 때, 그것은 불행을 경험한다. 사실은, 그것의 바람이 성취되었을 때, 마음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진아인 행복을 즐긴다.

 

비슷하게, 잠과 삼매와 기절 상태 속에서, 그리고 바라는 대상을 얻거나 싫은 대상이 제거되었을 때, 마음은 내향적이 되어서 순수한 진아-행복을 즐긴다. 이렇게 마음은 쉬지 않고 진아 밖으로 나가는 일과 진아를 향해서 가는 일을 번갈아서 한다.

 

나무 아래서는 그늘이 즐겁다. 펼쳐져 있는 밖으로 나가면 열이 피부를 태운다. 뙤약볕 아래서 돌아다니던 자가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게 느낀다.

어떤 사람이 그늘에서 뙤약볕으로 나가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늘로 돌아온다면 그는 바보다. 현명한 사람은 그늘 속에 계속 머문다.

 

비슷하게, 진리를 아는 사람의 마음은 브라만을 떠나지 않는다. 반대로, 무지한 자의 마음은 세상 속에서 맴돌다가 비참하게 되면, 그때야 잠시 브라만에게 돌아가서 행복을 경험한다. 사실, 세상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생각일 뿐이다.

 

세상이 사라진 때, 다시 말하면, 생각이 없을 때, 마음은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세상이 다시 나타나면, 불행이 나타난다.

 

25. 지혜-통찰은 무엇인가?

 

고요 속에 남는 것이 지혜-통찰이다. 고요하게 남는 것은 진아 안에 녹아드는 것이다. 정신감응,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을 아는 것과 천리안은 지혜-통찰에 해당하지 않는다.

 

26. 무욕과 지혜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무욕이 지혜이다. 그 둘은 다르지 않다. 그들은 같다. 무욕은 어떤 대상을 향하여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다. 지혜는 대상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다른 말로, 진아 외에 다른 것을 찾지 않음이 집착이 없음이고 무욕이다. 진아를 떠나지 않음이 지혜이다.

 

27. 탐구와 명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탐구는 진아 안에 마음이 머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명상은 개인의 자아가 존재-의식-행복인 브라만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28. 해탈은 무엇인가?

 

구속되어 있는 개인의 자아의 특성을 탐구하여, 그의 진정한 특성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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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황인채)의 주석

 

1. “나는 누구인가?”라고 끊임없이 의문을 일으키는 자기탐구는 화두선과 매우 비슷한 수행법이다. 그래서 자구탐구는 참선을 하였던 자들이라면 용이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요가의 명상 중에는 힌두교 특유의 입문 의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탐구에서는 아무 의식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나 곧바로 시도할 수가 있어서 편리하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의식을 행할 수 없는 자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탐구를 해 볼 수 있다. 나는 대성 스님이 옮기고 탐구사에서 출판한 “바가반이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과 “구루 라마나”라는 두 권의 책을 읽고 이 자기탐구를 시작하였다.

 

그 중 “바가반이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은 인터넷에서 영문 판본을 pdf 문서로 입수하여 번역본과 비교를 하며 공부를 하였다. 덕분에 영어 실력도 늘고 마하르쉬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2. 원문에는 Bhagavan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로 신에 대한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팔리어로 쓰인 불교서적에서는 고타마 붓다에 대한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여기에서는 깨달은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라마나 마하르쉬를 따르던 신도들이 그 분을 영적인 스승으로 신과 같이 받들었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를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으로 받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도교나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이나 부처님을 진인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바가반을 진인으로 번역하여 보았다.

 

3. 마하르쉬의 가르침은 진아만이 실재(實在)한다는 일원론을 띠었다. 세계나 개인이나 신은 진아에 나타나는 허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일원론이라고 부르지 않고 비이원론이라고 불렀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불이론(不二論)이라고 한다.

 

그 외에 한정비이원론과 이원론을 주장하는 학파도 있었다.

 

한정비이원론에서는 진아 만이 아니라 물질세계나 개인 영혼도 실재로 인정하였지만 진아와 별개가 아니고 하나의 실재가 나눌 수 없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원론자는 신과 개인, 또는 영혼과 물질을 서로 다른 두 개의 실재로 인정하였다.

 

4. 이 진언(mantra)은 마하르쉬 님이 주신 진언이 아니다. 푼자라는 헌신자가 꿈속에서 받은 진언이라고 한다. 마하르쉬님은 자기탐구를 하라고 하셨지만 진언 염송(japa)도 명상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인가하셨다.

 

그리고 소리 내어 염송하는 것보다 마음속으로 염송(ajapa japa)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였다. 옴(Om)은 신 또는 브라만의 상징어이다.

‘나모 바가바테 슈리 라마나야’는 ‘신으로 오신 성스런 라마나 마하르쉬 님께 귀의 합니다.’라는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5.번역자 Mahadevan 박사는, 이 문단이 마하르쉬 님이 직접 쓴 산문이라고, 머리말에서 지적하였다.

   

6. 일곱 개의 조직(dhatus)은 체액(rasa), 피(rakta), 근육(mamsa), 지방(medas), 뼈(asthi), 골수(majja), 정자와 난자(shukra) 

 

7.다섯 종류의 활력을 주는 바람들(vayus) 중 prana는 심장과 가슴 부분에서 호흡과 감각 기능을 담당하고, apana는 배꼽 아래쪽에서 출산의 기능을 담당하고.

samana는 배와 빼꼽 부근에서 소화와 신진대사 기능을 담당하고, udana는 목과 머리에서 대화와 생각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vyana는 말초 신경과 전신에 흩어져서 순환과 운동 기능을 담당함.

 

8.진인 마하르쉬가 이곳에서 말하는 심장은 피를 펌프질하는 왼쪽 심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 오른 쪽에 있는 영적인 심장이다.

 

요가 수행자들은 흔히 양 눈썹 가운데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련을 하는데, 마하르쉬는 이 심장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오늘 쪽 가슴에 인류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직관으로서의 나라는 의식의 중심인 심장이 있기 때문이다.

 

9. 세 가지 우주적 기능은 창조와 유지와 파괴로, 인간의 탄생과 삶과 죽음에 대응된다. 신의 다섯 겹의 행위는 위의 앞의 세 가지에 미혹에 의한 속박과 은해에 의한 해탈을 더 해서 다섯이다.

 

10. 진아를 덮은 다섯 껍질(Kosha)은 바깥쪽부터 1. 육체적 또는 음식의 껍질 2. 에너지의 껍질 3. 정신적 껍질 4. 앎(知)의 껍질 5. 환희의 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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