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사람이, “우리에게 진아(眞我)-인지(認知)에 대하여 말해 주세요.”라고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대들의 마음은 침묵 속에서 낮과 밤들의 비밀들에 대하여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들의 귀는 그대의 마음속으로 인지한 것을 말소리로 듣기를 갈망하오.
그대들은 생각 속에서 항상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낱말들로 알기를 원하오.
그대들은 그대들 꿈속에 나타난 벌거벗은 몸을 그대들의 손가락으로 만져보기를 원하오.
그리고 그대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대들의 영혼 속에 감추어진 들끓는 샘물은 솟아올라서 웅얼거리며 바다로 달려가야 하오.
그대들의 무한히 깊은 우물속의 보물들은 그대들의 눈앞에 드러나야 하오.
그러나 거기에 그대들의 알려지지 않은 보물을 달아볼 저울이 있게 해서는 아니 되오.
그리고 그대들의 알아차림의 깊이를 자막대기나 추를 단 줄로 재어보지도 마시오.
왜냐하면 신적(神的) 자아는 끝이 없고 잴 수도 없는 바다이기 때문이오.
“나는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나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하시오.
“나는 영혼의 길을 발견했다.”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나는 나의 길 위를 걷고 있는 영혼을 만났다.”고 말하시오.
왜냐하면 영혼은 모든 길들 위를 걷기 때문이오.
영혼은 어느 한 길로만 걷지도 않고, 갈대처럼 자라지도 아니 하오.
영혼은 무수한 꽃잎을 가진 연꽃처럼 스스로 피어날 것이오.
*역자 덧붙임 말
윗글에서 저자는 힌두교 성자들이나 요가 수행자들이 사용하는 단어들과 비유들을 직접 사용하여 그의 사상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사상은 인도 사상의 주류인 인 비이원론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서 그 점에 대하여 간단히 말해보고자 한다.
힌두교 비이원론에서는 진아 깨달음(Self-realization)을 위해서 수행을 한다. 이것을 지적 측면에서 진아-인지(Self-knowledge)라고 하기도 한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여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면 진아가 밝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의 자아와 진아를 강물과 바다에 비유하기도 한다. 진아의 활동력이 (또는 신이) 세계를 창조하면 진아는 모든 창조물 속에 스며들어 간다. 그런데 무지의 장막에 갇힌 개인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개인과 진아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강물과 바닷물이 하나이듯이 진아와 개인은 하나라는 것을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서 바닷물이 되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이원론에서는 진리는 오직 진아 뿐이다. 진아만이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래서 진아를 깨달은 자는 수많은 진리 가운데서 (위에서 저자가 알무스타파가 입을 빌어서 말하듯이) “나는 오직 하나의 진리만을 찾았다.”고 하지 않는다.
윗글에서는 영혼(soul)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비이원론자들도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것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jiva로 jiva를 실체로 인정하는 자는 고통 속에서 윤회하는 생사의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영혼도 실체가 아닌 무지가 만든 허상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끝을 찾아보았더니, “바람 속에서 한 순간의 휴식이 있고, 잠시 후, 다른 여인이 나를 낳을 것이오.”라는 구절이 있었다. 알무스타파는 윤회설을 받아들이고, 윤회의 힘을 빌어서 예언자로 다시 세상에 오겠다고 한 것이다. 진아를 깨달아서 윤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비이원론과 지브란의 사상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윗글 끝 절에 나오는 “무수한 꽃잎을 가진 연꽃처럼”이라는 표현에서 나오는 연꽃도 일부 요가 수행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사람의 몸에는 영적인 에너지(kundalini)의 저수지와 같은 영맥(chakra)이 일곱 개가 있다고 하고, 머리 정수리 끝에 있는 영맥을 “사하스라라(sahasrara)”라고 부른다. 그 곳을 일천 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으로 상징하고, 거기에 정신을 집중하면 영적인 에너지가 각성되어 진아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정도의 예비지식을 가지고 이 글을 읽는 다면 좀 더 흥미롭게 이 글을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