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장 밥벌이 노동
위대한 자연은 우리에게 이마에 흐르는 땀으로 우리의 밥을 얻도록 정하였다. 모든 사람은, 그러므로, 단 일분 동안이라도 빈둥거린다면 그것은 그만큼 이웃들에게 짐을 지우게 되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비폭력주의의 첫 번째 교훈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비폭력주의에서 우리의 이웃에 대한 균형이 잡히고 깊은 배려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게으른 사람은 이 기본적인 배려가 부족한 자이다.
Y.I., 11-4-'29, p. 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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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율법에 따라, 사람은 그의 손으로 노동하는 것에 의해서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것은, 러시아 작가 본다레프에 의해서 최초로 강조되었다. 톨스토이는 이것을 알리고 넓게 공표하였다.
내 생각에는, 같은 원칙이 바가바드기타 제 삼장에도 들어있는데, 거기에 제시된 바에 따르면, 희생의 제물을 제공하지 않고 먹는 자는 훔친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하였다. 희생의 제물은 여기에서 단지 밥벌이 노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성도 역시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어떻게 밥벌이 노동을 하지 않는 자가 먹을 권리를 가진단 말인가? ‘이마에 흐르는 땀으로 그대는 그대의 밥을 먹을 것이다.’라고 성서에서는 말한다.
만약 백만장자가 하루 종일 그의 침대위에서 뒹군다면, 음식을 제공받을지라도, 그는 심심해져서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운동에 의해서 밥이 소화되게 하여야 하고, 그 후에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이다.
만약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든 사람이 이렇게 어떤 모양이나 형태의 운동을 하여야 한다면, 왜 그것을 밥벌이 노동 같은 생산적인 형태로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가?
아무도 농사일을 하는 자에게 호흡조절 운동이나 근력운동을 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류의 열 명 가운데 아홉 명 이상이 땅을 경작하는 것으로 삶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나머지 열 번째 사람이 압도적인 다수의 예를 쫓아서 최소한 그의 양식을 얻기에 충분한 정도의 노동을 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고 그리고 더 평화롭게 될 수 있을 것인가?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세계적인 갈등이 있고,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을 시기한다. 만약 모두가 그들의 밥을 위해서 일을 한다면, 계급의 구별들은 없어질 것이다. 부자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을 단지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고 생각할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주로 공중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다.
밥벌이 노동은 비폭력을 준수하고, 진리에 예배하며 그리고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을 자연법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참된 은총이다. 이 노동은 사실은 농업과만 관련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어쨌든지, 모든 사람이 농사일을 하는 위치에 있지는 않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땅을 경작하는 대신에 실을 잣거나 베를 짜고, 목수일이나 대장간 일을 할 수 있고, 그것들은 항상 농업과 관련되며, 그것도 아주 좋은 직업들이다.
모든 사람은 청소부가 되어야 한다. 배변은 먹는 일처럼 꼭 필요한 일이고, 그리고 최선의 방식은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각 가족이 가족의 청소를 보살펴야만 한다.
나는 수년 동안, 청소가 사회에서 분화된 계급의 일로 되어 진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다. 우리는 최초에 이 공중위생 서비스에 가장 낮은 신분을 가진 자를 할당한 사람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누구이건, 좌우지간 그는 우리에게 결코 옳은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어린 시절부터, 우리 모두가 청소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우리의 마음에 명심하도록 하여야 하며,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이것을 깨달은 사람 모두가 청소를 하는 일로부터 밥벌이 노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청소가, 이렇게 알기 쉽게 이루어지면, 인간의 평등권에 대한 진실한 인식에 도움이 될 것이다.
From Yeravda Mandir, 1957, Chap.IX, p.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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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들의 진실한 근원은 의무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의무들을 모두 지킨다면, 권리들은 찾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의무들을 실행하지 않고 남겨둔 채 권리들을 쫓는다면, 그것들은 도깨비불처럼 우리에게서 도망할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더 많이 찾을수록, 그것들은 더 멀리 날아갈 것이다.
그와 똑같은 가르침이 크리슈나(역자 주: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신)에 의해서 불멸의 언어로 구체화되었다. ‘행위는 단지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그 결과에 대하여 오로지 초연하여라.’ 행위는 의무이다. 그 결과는 권리이다.
Y.I., 8-1-'25, p.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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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새들과 동물들조차도 가지는, 생필품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그리고 모든 권리는 그것에 따르는 의무와 그것 위에 가해지는 어떤 공격에도 저항하는 구제책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권리에 따르는 의무와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평등권을 입증하기 위한 구제책을 찾는 문제이다.
수반되는 의무는 나의 손과 발로 일을 하는 것이고, 대응하는 구제책은 나의 노동의 생산물을 빼앗는 자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이다.
Y.I., 26-3-'31,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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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두가 자신들의 밥벌이 노동을 하였다면, 그 후에 모두를 위한 충분한 음식과 충분한 여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구과잉으로 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질병도 없고 우리 주위에서 보는 이러저러한 비참한 일도 없다. 이런 노동은 가장 높은 형태의 헌신일 것이다.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많은 다른 일들을 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보편적인 선을 위한 사랑의 노동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에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어질 것이고, 높은 자도 낮은 자도 없고, 접촉해도 좋은 사람도 접촉해서는 아니 될 천민도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마 성취할 수 없는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그칠 필요는 없다. 만약 온전한 헌신의 법칙을 완수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을 위한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법칙이라면, 우리는 그 이상을 향한 먼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필요는 최소화될 것이고, 우리의 음식은 간소해 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을 것이고, 먹기 위해서 살지 않을 것이다. 이 제안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밥을 위하여 땀을 흘리는 것을 시도해 보게 하라, 그러면 그는 그의 노동의 생산물에서 가장 큰 위안을 얻을 것이고, 그의 건강은 증진되고, 그리고 그가 누렸던 많은 것들이 사치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H., 29-6-'35, p.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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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한 밥벌이 노동은 어떤 때에도 사회봉사의 가장 높은 형태였다.
형용사 ‘총명한’은 사회봉사를 위한 노동은 그것 뒤에 명확한 목적을 가지야만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하는 노동의 앞에 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노동을 사회봉사 행위라고 말하는 혼란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뜻하는 일은 다른 것보다 더 높은 의미를 가졌다. 모든 보편적인 선을 위하여 일을 하는 사람은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고, 그의 일은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밥벌이 노동은 사회 봉사행위와 다르지 않다.
H., 1-6-'35,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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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들의 밥벌이를 지적인 노동을 통해서 해도 좋지 않은가? 아니다. 몸에 필요한 것들은 몸을 사용하여 공급하여야 한다.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주어라.”라는 (성서에 나온) 말은 여기에 잘 적용된다.
단지 정신적이라면, 그 지적인 노동은 영혼을 위한 것이고, 만족 그자체로 위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보상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의사들과 변호사들 그리고 그와 유사한 지식인들이 오로지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일할 것이고,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을 것이다.
밥벌이 노동 규율의 준수는 사회구조에 조용한 혁명을 가져올 것이다. 인간의 승리는 상호 봉사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에 의하여 생존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대체하는 것으로 이룩될 것이다. 짐승의 법은 사람의 법에 의하여 대체될 것이다.
농촌으로 귀향은 밥벌이 노동의 의무에 대한 명확하고 자발적인 인식과 그것이 포함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자들은 “수백만의 인디아 어린이들이 오늘날 농촌에서 살고 있고 아직도 그들은 굶주림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애석하게도 이것도 역시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그들에게 (밥벌이 노동 규율에 대한) 자발적인 준수가 없다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아마 육체노동을 회피하려 할 것이고, 그리고 도시에서 적응할 수만 있다면 가까운 도시로 재빨리 빠져 나갈려 할 것이다.
주인에게 강제로 복종함은 노예의 상태이고, 아버지에게 기꺼이 순종함은 아들 신분의 영광이다. 비슷하게 밥벌이 노동 규율에 강제로 따름은 가난과 질병과 불만족을 키운다. 그것이 노예의 상태다. 그것에 기꺼이 따름은 만족과 건강을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참다운 재산인 건강이고, 금과 은 조각들이 아니다.
H., 29-6-'35,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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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떼
나의 비폭력주의는 밥을 벌어먹기 위하여 어떤 정직한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 건강한 사람에게 공짜식사를 제공하는 견해에 대하여 너그럽지 않고, 그리고 내가 힘을 가졌다면, 공짜 식사를 제공하여 공덕을 쌓으려는 모든 자선행위를 금지시키겠다.
그것은 국가의 지위를 떨어뜨리고, 게으름과 나태, 위선행위, 그리고 심지어 범죄까지 부추긴다. 잘못된 자선행위를 한 이런 사람들은 물질적이거나 영적인 국가의 부에 조금도 기여한 것이 없고, 기증자의 공덕에 대하여 거짓된 의미를 부여하였다. 만약 기증자가 건강하고 깨끗한 환경 아래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남녀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열린 제도 안에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현명하고 훌륭한 일이 될 것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물레질 하는 것이나 목화를 가공하는 과정들 중에 생기는 어떤 일들이 이상적인 직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어떤 다른 일을 선택해도 좋다. 단지 그 규율은 “노동이 없이 밥도 없음.”이 되어야 한다.
모든 도시는 거지에 대한 그들의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책임을 가져야 하는 한 가지 문제이다. 나는, 게으른 자들의 면전에 공짜 점심을 던지는 일이 더 쉽고, 식사를 제공하기 전에 정직한 일을 하여야 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돈에 대한 관점에서 보자면 처음단계에서는 어쨌든, 사람들이 일하는 것에 따라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비용이 현재의 공짜 취사에 드는 비용보다 더 많이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급속하게 퍼지는 부랑자들의 진행이 기하급수 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길게 보자면 그것이 더 싸다는 것을 확신한다.
Y.I., 13-8-'25,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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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걸이 장려되는 것을 나쁘게 여기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일도 음식도 주지 않고 거지를 쫓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느낀다. 만약 그가 일을 않는다면, 나는 그에게 음식이 없이 가게 할 것이다. 절름발이와 불구자처럼 육체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자들은 국가에서 부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장님인 체하는 사기꾼이 많이 있고 또한 진짜 장님도 있다. 매우 많은 장님들이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수입으로 부자가 되어있다. 그들이 이 유혹에 노출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호소에 보내진다면, 그것이 훨씬 좋은 일이 될 것이다.
H., 11-5-'35, p. 99